그때 그시절

에로 영화 전성시대를 회고 한다,,"애마부인"

우리다운 2007. 1. 4. 16:33
에로영화 전성시대를 회고한다

지금은 인터넷과 비디오 등으로 자취가 희미해졌지만 80년대는 에로영화 전성시대였다. ‘애마부인’ ‘뽕’ ‘매춘’ 등. 지금 보면 “저게 무슨 에로영화냐”고 코웃음을 칠 정도로 수위가 약했음에도 당시에는 소재와 표현을 두고 적잖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KBS ‘오래된 TV’는 한 번쯤은 몰래 보았음직한 80년대 에로영화를 추억하고, 당시 에로영화가 미친 사회적 현상 등을 진단하는 ‘에로영화 전성시대’를 26일 방영한다.

 

82년 개봉된 ‘애마부인’은 에로영화의 큰 획을 그은 작품이다. ‘애마부인’ 이전에는 진정한 에로영화는 없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다. 동생을 공부시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몸을 팔게 되는 여성을 주로 그린 70년대 ‘호스티스영화’들은 마케팅 기법으로 에로영화를 표방하기도 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사회성 짙은 영화다.

 

그러나 ‘애마부인’은 여성 스스로 욕망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본격 성애영화다. 1대 애마 안소영은 풍만한 가슴과 게슴츠레한 눈 등으로 부풀어오르는 성욕을 표현했다. 금지품목인 동물(말)까지 등장했으니 파장이 클 수밖에 없었다. 제작사는 제목인 ‘애마부인’의 ‘마’를 말(馬)이 아닌, 삼(麻)으로 표기함으로써 검열을 피했다.

 

대학졸업반이었던 82년 서울극장에서 길게 서 있는 줄 뒤편에 슬쩍 붙어 표를 사 ‘애마부인’을 봤다. 성(性)에 대해서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던 당시 기껏해야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플레이보이나 선데이서울 잡지를 통해 성 내공을 쌓던 남성들에게는 충격 그자체였다.

 

‘엠마뉴엘’의 실비아 크리스텔 같은 서양여성이 아닌 한국여성의 성적 욕망을 제도적으로 보장된 개봉관에서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단관 개봉으로 40만명 관객을 동원했다면 지금의 멀티플렉스 환경이라면 적어도 500만명은 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단독주택, 아파트, 초원이라는 세 공간을 여인의 심리와 연결시킨 서사구조를 놓고 에로티시즘 담론으로 발전시킬 사회적 분위기는 아니었다.

 

‘애마부인’ 시리즈가 13편이 제작되면서 작품성 높은 에로영화로 계승되지 못한 건 지금 생각해도 무척 아쉬운 일이다. 이후 ‘체위경연장’ 같은 아류 에로물, 제목과 내용이 완전히 따로 노는 ‘젖소부인 바람났네’ 등으로 몰락의 길을 재촉했다.

 

에로영화의 침체는 음란비디오를 틀어주는 모텔의 대거 등장과 비디오라는 매체 환경 변화 탓도 있지만 타의에 의해 조성된 환경도 큰 이유다. 광주민주항쟁을 무력으로 제압한 신군부 독재정권은 야간통행금지 해제와 교복두발 자유화 조치와 함께 스크린, 섹스, 스포츠라는 ‘3S’ 정책으로 대중을 풀어줬다. 이에 힘입어 문화예술인보다는 문화 장사꾼들이 끼어들어 에로영화시장 분위기를 흐려놓았다. 최루탄과 화염병이 난무하던 정치 과잉의 시대에 젊은 대학생들은 에로영화를 보며 정치적 무력감을 느꼈을 것이다.

 

요즘 인터넷에 범람하는 포르노는 역겨움을 주지만 완성도 높은 에로틱한 영화 한 편은 젊음의 갈증을 어느 정도 해소해줄 수 있다. 에로티시즘 영화의 미학과 효용가치는 인터넷 시대에도 여전히 논할 만하다고 본다.

 

 

서병기 대중문화전문기자(wp@herald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