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혁명

생각을 나눠 기쁨이 되게 하는 것.

우리다운 2007. 3. 20. 02:11

며칠 전에 이사를 했습니다. 집 마루에 앉으면 멀리 덕소부터 흘러오며 점점 강폭이 커지는 한강이 아주 가까이 보이는 곳에서 5년을 살고, 이제 야트막한 앞산이 아파트에 가려져 반만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산이 가까운 산동네에 왔습니다.

이사를 하게 되면 가장 큰 고민이 짐을 정리하는 일인데 늘 그렇듯 책꽂이에 정리해 두었을 때보다 꺼내 놓고 보면 턱없이 많아져 버리는 것이 책 짐입니다. 이사해주시는 아저씨는 차를 두 대 준비했다가 짐 싸면서 두 대를 더 불러와야 했고 바구니도 수십 개를 더 가지고 오셔야 했습니다.

죄송한 마음에 끝내고 돌아가시는 분께 수고비를 더 드렸더니 웃으시면서 다음에는 큰 차를 두 대 불러야겠다고 시원하게 말씀하시며 가셨습니다. 고마워서 다음에 이사할 때도 잘 부탁드린다고 하였더니 웃으시네요.

세간 살이야 하루면 정리가 끝나는데 책 정리는 끝이 없습니다. 핑계야 이제 오래 되어서 버릴 것을 고른다고 하며 앉지만 한 권 두 권 살펴보다 보면 그 책에 담긴 사연과 함께한 시간들이 고스란히 되살아나 시간은 하염없이 가고 맙니다.

이사를 앞두고 준비할 때는 ‘이번에야말로 책을 좀 정리해야지’ 하였지만 이번에도 이사하면서 또 느끼는 것이 버릴 책이 별로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포항에서 이사 올 때야 서울 가서 다시 아이들 만날 생각을 하며 학급문고로 썼던 천 권이 넘는 동화책까지 다 싸들고 왔지만 이제는 다시 아이들 곁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으니 마음으로는 ‘이제 동화책은 좀 정리를 해야겠지’ 했습니다. 하지만 한 권 한 권 꺼냈다 저는 다시 넣어야 했습니다.

‘예쁜 우리 수연이, 생일 축하합니다. 1987년 9월 23일’. 아마 수연이 생일에 동화책을 한 권 사서 수연이에게 먼저 읽게 하고 생일 기념으로 학급문고에 기증한 것이겠지요. 수연이 생일을 맞아 앞으로 그 책을 보게 될 많은 아이들이 함께 기억하고 축하해 주기를 바라는 그 때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이러니 저는 결국 달팽이처럼 평생 책 짐을 이고 지고 다녀야 할 것 같습니다.

 

(일러스트/이수영)

 

저는 책을 잘 사고 또 많이 삽니다. 저를 위해서 사기도 하지만 누군가를 위해 사는 것도 좋아하고 많이 합니다. 그래서 어떤 책은 같은 책을 수백 권 산 것도 있을 정도입니다. 물론 읽는 것도 좋아해서 책 읽는 시간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라고 여길 때도 있습니다.

시집갈 때 머리를 숙여야 들어가는 작은 신혼 방에 달랑 책만 싸들고 갔습니다. 어이없어 하던 시댁 식구들은 철없는 새 식구를 위해 나무판과 벽돌 수 십장을 구해 와서 흔들흔들하는 책장을 만들어 주셨고 저는 그 책장을 십 년이나 들고 다니며 썼습니다.

아이가 자라서 위험해지게 되어 나무 책장으로 바꿀 때까지. 책이 늘면 벽돌과 나무판을 더 구해 와서 덧붙이기만 하면 되니 우리 집엔 공간만 생기면 책장이 들어섰습니다.

하지만 신혼시절 한동안은 저도 마음 놓고 책을 살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 3천원으로 광양서 하동까지 출퇴근 차비하고 하동 장을 보아 와서 신랑 도시락까지 싸며 하루를 살아야 했으니 책은 그림의 떡이라 시간나면 동네 작은 책방에 서서 두세 시간 읽고는 500원짜리 문고판 한 권 사들고 부끄럽고 가려운 뒤꼭지를 감추며 나와야 했습니다. 도서관도 없었고 책 대여점도 없었을 때입니다.

그 때 가진 제 꿈이, 나중에 내가 좋아하는 책을 친구들한테 마음껏 사 줄 수 있을 만큼만 돈을 벌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그 꿈이 이루어진 지금 생각하면 좀 후회가 되긴 합니다. 좀 통 크게 까짓, ‘카네기처럼 우리나라에도 뉴욕공공도서관 같은 도서관을 지을 만큼 돈을 벌겠다’ 하는 꿈을 가지는 것이었는데.

그런데 이번에 이사하며 보니 저는 받은 책이 준 책보다 더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친구들의 덕담과 사연이 담겨 있는 책 을 보며 모자라는 책장 대신 바닥에 쌓아 두면서도 마음은 더 따뜻하고 넉넉해 졌습니다.

사람은 생각한 대로 된다고 하던가요? 학교에 있을 때도 책 읽고 또 아이들에게 책 읽어 주는 독서지도가 제일 큰 관심사였고 담임 안 할 때는 도서관 운영, 교실에도 집에도 책이 넉넉하였는데 결국 지금은 ‘도서관 친구’ 활동을 하는 제가 되었습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 그것은 ‘생각을 한다’는 뜻이 아닐까 합니다. 같은 책을 읽고 싶다는 것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또는 하고 싶다는 뜻이기도 하겠지요. 좋은 책을 읽고 좋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우리 사는 세상이 지금 보다 조금은 더 따뜻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 하는 바람을 마음에 품어 보면서.

제가 좋아하는 책 중에, 또 가능하면 널리 나누고 싶은 책 중에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과 이현주 목사님께서 생각을 나눈 《노자 이야기》란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무위당 선생님은 말이나 행동을 조심하려고 하기 전에 먼저 마음을 잘 닦으라고 하십니다. 마음속에 바른 생각(그 분은 ‘도’라고 하십니다)을 잘 모시고 살면 구태여 말이나 행동에 조심할 까닭이 없다고 하시면서.

저는 이 말을 늘 마음에 담아 두고 틈날 때마다 떠올려 보고 ‘지금 내 안에는 어떤 생각이 있나’ 살펴봅니다. 수지침 하시는 박광수 선생님 말씀이 마음도 밥 먹듯 먹어야 한다고 하셔서 끼니 챙기듯 일삼아 떠올립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들을 늘 하고 있었더니 함께 나눌 친구가 광진도서관 친구들을 중심으로 이제 2백 명이나 생겼습니다. 또 동대문, 서초, 순천 곳곳에 생기고 있다고 하고요. 참 신기한 일이라 요새 저는 더 자주 생각을 살펴봐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습니다.

‘도서관 친구’라고 하면 다들 아이들이 도서관에 자주 가면 되는 것인가 하고 생각들을 하시는데 도서관을 후원하고 도서관의 발전을 돕는 일을 하며 책과 생각을 나누는 어른 친구들입니다. 물론 회비나 후원금도 내야하고 일주일에 한 번 모임도 합니다. 꼭 다 나와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오는 친구들은 매주 만나면 덤으로 밥도 나누고 정도 나누고 각자가 가진 개성과 특기도 나누고 또 준비해 온 정성도 나눕니다.

그래도 가장 많이 나누게 되는 것이 웃음과 책인데요. 실컷 웃고, 한 달에 한 권 책을 정해 같이 읽고 이야기도 나누고 하는데 요즘은 한 권이 늘어 시집이 한 권 보태졌습니다.

이럴 때 특히나 저는 책을 나누고 싶어 하는 버릇(?)이 있는지라 틈만 나면 제가 좋아하는 책을 사서 나누어 주곤 합니다. 그러면 우리 친구들 중에는 웃으며 ‘근데요. 다음에 만나면 그 책 어땠어요? 하고 묻지 마세요’ 그러기도 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우리 집에 나눌 책이 점점 더 쌓여 가서 좀 걱정이 됩니다. 이고 지고 거리에 나서야 할까봐서.

‘나눈다는 것.’ 평소에 전혀 생각해 보지 못했던 주제라 저는 한동안 곰곰 생각해 보아야 했습니다. 나눈다는 것은 누군가에게서 나누어 받았다는 것이고 또 누군가에게 주는 것인데 그 안에 가득한 것은 기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그래 다르게 말하면 누군가 나에게 준 기쁨을 또 나 아닌 누군가에게 보내어 기쁨이 되게 하는 것, 그래서 우리들 마음속에 잠자고 있는 기쁨을 가만히 일으켜 깨우는 것. 나는 그저 즐겨 징검다리가 되는 것. 혼자 해 본 생각입니다.

그 중에서도 생각을 나누어 기쁨이 되게 하는 것이 제겐 제일 마음에 듭니다. 아름다운 사람이 되게 하는 생각이 가득 담긴 책들 많이 있는데……. 누가 저와 책 좀 나누실래요?




여희숙 | 22년간 초등학교에서 아이들과 지내다가 5년 전 서울로 이사를 오면서 백조가 되었습니다. 가끔 부르는 학교에 가서 하루 선생으로 수업도 하고 선생님들께 독서 토론 이야기도 들려드리는데 요즘은 주로 ‘도서관 친구들’ 활동을 하며 ‘우리나라에 뉴욕 공공도서관 같은 도서관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 글은 아름다운재단에서 발간하는 월간 콩반쪽(2007년 3월호)에 소개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