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혁명

우리가 사랑하고, 우리가 버린 여자...최.진.실.

우리다운 2009. 1. 13. 16:10

불꽃처럼 열심히 살다간...
그녀의 죽음이 결코 헛되지 않기를....







 

 
90년대 최진실은 모험과 안정 사이를 종횡무진 하는 필모그래피로 자신을 시험하는 기간을 가졌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은 물론, 불륜에 빠지는 주부를 연기한 영화 <엄마에게 애인이 생겼어요>(1995)나 헤어진 유부남을 잊지 못하는 전화교환원으로 등장한 영화 <홀리데이 인 서울>(1997)처럼 기존의 이미지를 배반하는 작품들이 있었는가 하면, 심혜진의 콘트라스트가 되었던 영화 <사랑하고 싶은 여자 결혼하고 싶은 여자>(1993)나 귀신이 되어서도 가족들 곁을 지키는 애절한 사랑을 보여준 영화 <고스트 맘마>(1996)는 최진실의 발랄한 이미지에 성숙한 여성의 느낌을 더해 주는 작품들이었다. <편지>는 당시 신인이었던 박신양과 함께 주연을 맡았던 멜로 영화로, 최진실은 사랑에 빠지는 설렘부터 결혼 생활의 짧은 행복, 죽은 남편의 편지를 받아들고 오열하는 슬픔까지 폭넓은 감정연기를 성공적으로 보여주었다. 영화에서 국문과 강사로 등장한 최진실은 손수건으로 머리를 묶는 등의 수수한 스타일로도 인기를 모았고 그가 극 중에서 낭송한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는 그해 최고의 애송시로 부상하기도 했다. 이후로 그녀는 영화와 드라마에서 항상 당당하고 야무진 성격적 바탕을 고수해 최진실이라는 배우를 브랜드화 하는데 성공한다. 말하자면 <편지>는 최진실 필모그래피의 마지막 청순가련이자, ‘배우 최진실 실험’의 최종 단계였던 셈이다.

최진실은 무엇보다 부지런한 배우였다. 홀어머니와 동생들의 기둥이 되는 맏딸이었던 <사랑의 향기>(1994), 야심 강한 자동차 디자이너를 연기한 <아스팔트 사나이>(1995), 덜렁대는 성격의 르포 기자로 등장한 <째즈>(1995), 괜찮은 남자에게 시집가는 것만이 인생목표인 백수 노처녀를 연기한 <아파트>(1996)까지 잠시도 쉬지 않았고 장르와 캐릭터 역시 가리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작품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별은 내 가슴에>에서 고아로 자라다 아버지 친구의 집에 입양된 연이(최진실)가 새어머니를 비롯한 의붓 남매들의 구박과 질시에도 굴하지 않고 패션 디자이너로 성공하고 재벌 3세 준희(차인표)와 인기 가수 강민(안재욱)의 사랑을 받는다는 스토리 역시 뻔해 보였지만 밝으면서도 꿋꿋한 최진실의 이미지와 맞물려 대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이 작품에서 최진실은 준희가 이탈리아에서 만났던 신비로운 여인 ‘소피아’까지 1인 2역을 연기하며 배역에 따라 스타일과 캐릭터를 바꾸어 등장하며 화제가 되었다. 어느새 서른, 더 이상 트렌디 드라마의 여주인공을 맡기 어려울 거라던 섣부른 예측을 뛰어넘은 최진실. 하지만 놀랍게도 <별은 내 가슴에>가 최진실이 연기한 마지막 신데렐라는 아니었다.


최진실이 그렇게 오랫동안, 전 연령대에 걸쳐 사랑받을 수 있었던 것은 변화의 타이밍과 방향을 정확히 캐치하는 능력 덕분이기도 했다. <그대 그리고 나>는 여자친구나 아내 뿐 아니라 ‘며느리’로서의 최진실 캐릭터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작품이었고 이는 <장미와 콩나물>(1999)로 이어졌다. 부잣집에서 곱게 자랐지만 가난한 집 맏아들 동규(박상원)와 결혼하며 홀시아버지와 시동생들까지 모시게 된 수경(최진실)은 싹싹하고 솔직한 성품으로 시댁과 친정의 대소사를 헤쳐 나가며 가족 드라마의 중심축이 되었고, 극 중 최진실이 사용했던 무선전화기가 주부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며 과거의 ‘최진실 목걸이’, ‘최진실 파마’ 못지않은 간접광고의 힘을 발휘했다. 또, 당시 닥쳤던 IMF로 위기에 처한 기아 자동차의 광고에 무료로 출연했던 최진실은 작품 안에서 사내커플로 맞벌이를 하다 IMF로 인해 1년간 무급휴직을 하게 되었을 때도 집안일을 회사일처럼 열심히 해 보겠다며 씩씩하게 받아들여 국민들의 얼어붙은 마음에 모처럼 온기를 더해주었다.


전혜성의 소설 <마요네즈>는 파격적인 어머니상을 통해 모녀관계를 재조명한 작품으로 이를 원작으로 한 연극이 대학로에서 장기간 공연되기도 했다. 오랜 동안 ‘한국의 어머니’를 상징하던 김혜자는 영화 <마요네즈>에서 죽어가는 남편을 앞에 두고도 헤어 관리를 위해 머리에 마요네즈를 바르는 이기적이고 화려한 어머니 역을 맡아 화제를 모았으며 최진실은 그런 어머니를 참을 수 없어 하는 딸이자 일상에 치어 있는 주부의 역할을 무리 없이 소화해 냈다. 영화에서 최진실은 상황의 대부분을 대사로 풀어나가며, 거의 모든 상황을 김혜자와 대립하듯이 연기해야 했는데 그녀로서는 간접적으로나마 연극적인 연기를 경험한 셈이다. 당시 데뷔 10년을 넘긴 그녀는 극의 중심에서 빛나는 주인공이 아닌, 주목받는 인물을 옆에서 받쳐주는 평범한 역할을 선택함으로써 오히려 자신의 연기 영역을 넓히는데 성공했다. 대 배우와의 경쟁을 통해 자신의 한계를 끌어 올리려고 한 그녀는 누구보다 영리한 사람이었으며, 용감한 배우였던 것이다.


<그대를 알고부터>(2002), <장미의 전쟁>(2004)의 부진 이후 한동안 활동이 뜸하던 최진실은 자신의 연기 역사상 가장 초라한 역할을 통해 가장 화려하게 부활한다. 당시 MBC와의 전속 계약이 남아 있었으나 <장밋빛 인생>의 대본을 보고 너무 마음에 든 나머지 간곡한 설득으로 KBS 출연을 허락받았다는 후문을 남길 정도로 최진실은 시작 전부터 이 드라마에 큰 애정을 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삽십대 후반의 그녀는 연기력은 물론, 대본을 보는 눈썰미까지 갖춘 명실 공히 ‘국민배우’의 반열에 오른 스타였던 것이다. 이 작품에서 남편에게 배신당하고 병으로 죽어가는 주부를 연기하며 작정한 듯 화장기 없는 얼굴과 남루한 옷차림을 하고 오열과 몸부림을 아끼지 않은 열연을 보여준 최진실은 다시 한 번 징그러울 정도로 철두철미한 여배우로서 재평가되었다. 2004년 야구선수 조성민과의 이혼 과정이 공개되면서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그악스러운 이미지로 추락했던 그녀는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정직한 ‘연기력’ 뿐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최진실은 그 절박함에서 나온 연기를 통해 수많은 시청자들의 지지를 얻은 과거의 국민 요정은 ‘국민 아줌마’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톱스타가 된 첫사랑과 재회한 40대 이혼녀의 신데렐라 스토리. <장밋빛 인생>으로 시작해 <별은 내 가슴에>로 끝난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은 최진실의 존재로부터 설득력을 부여받은 작품이었다. ‘아줌마’를 상징하는 파마머리로 등장해 생활고에 찌들고 남편의 외도에 지친 홍선희의 캐릭터를 천연덕스럽게 보여주었던 최진실은 중반 이후 멜로의 감정선을 충실히 따라가며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여자, 홍선희를 섬세하게 연기해냈다. 그리고 이 작품을 연출했던 이태곤 감독의 말대로 최진실은 자신이 여전히 예쁘고 해맑고 사랑스럽다는 것을 시청자들에게 완벽히 증명했으며 나이가 들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이혼을 하고 나서도 ‘아줌마’ 이상의 존재가 될 수 있는 배우임을 확인시켰다. 데뷔 이후 20년, 다른 누구도 가지 못했던 길을 갔고, 수없이 많은 벽에 부딪혔지만 매번 그것을 뛰어넘었던 그에게는 분명 새롭게 시작되는 길이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이 작품이 그녀 생애의 마지막 드라마였다.

 ( 출처 : http://www.magazinet.co.kr )

 

                                          스타고백, 스카이로 재탄생 최 진 영
 

톱탤런트 최진실의 남동생’이라는 수식어를 달고다니다 드디어 ‘인기 탤런트 최진영’으로 독립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스포트라이트의 바깥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눈물과 오기와 굴욕의 3년 세월을 보내고 드디어 톱가수로 우 뚝선 ‘스카이’ 최진영.그의 30년 인생스토리를 들어본다.

'최진실 동생' 수식어 이제 그만
가수 스카이로 홀로서기 성공

또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내가 TV에서 노래할 때 걸핏하면 울곤 하니까 진 실누나가 “그렇게싸움박질 잘하고 망나니처럼 놀던 녀석이 왠 눈물이냐” 고 놀리던 생각이 난다. 탤런트로 활동할 때 항상 내 이름앞에 붙어다니던 ‘최진실의 동생’이라는 수식어.

 처음에는 자랑스러웠지만 나중에 조금 유명해지고나니 그렇게 부담 스러울 수가 없었다. 어쨌든 이제야 비로소 가수 ‘스카이’로 인정받게 되 니 감격스럽다. 그리고 지난 세월의 고통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지금은 이렇 게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과거를 회상할 수 있지만 당시는 얼마나 서럽고 힘들 었던가. 누나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남몰래 연기연습에 땀을 흘렸고 심지어 생 전 처음 장사도 해봤지만 이것도 저것도 다 안됐다.

그래서 인생의 승부를 거 는 심정으로 어린 시절부터의 진짜 꿈인 가수를 최종목표로 정했다. 하지만 어머니와 누나의 반대가 상상 외로 거셌다.그래도 나는 이렇게 나이 서른에 홀로서기에 성공했다. 누나의 이름덕을 본 것도 없이,집안의 경제적 인 도움 하나 없이 ‘적수공권’인 나를 믿고 밀어준 프로듀서 강민형과의 ‘의리’로 당당히 일어섰다. 사람들은 내 배경이나 외모만 보고 곱게 자란 전형적인 외아들이란 선입견 을 갖고있는 것같다.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이란 표현도 서슴지 않는다.

방송가 에서는 ‘최진실의 후광’이라는 말도 자주 거론된다.바로 그런 것들이 내 오기를 더욱 자극해 오늘로 이끌지 않았는가 생각된다.내일부터 진짜 최진영 의 모습을 공개하겠다.독자 여러분은 손수건 몇장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서글픈 사글세방살이
멸치 몇마리 넣은 수제비…
어린시절은 가난-눈물로 얼룩

 ‘남의 집에 놀러가보기 전까지 이 세상의 모든 가족은 한방에서 부대끼며 자는 줄 알았다!’   나는 1970년 12월17일 서울 은평구 갈현동 달동네에서 아버지(64 최국현)와 어머니(54 정옥숙)의 1남1녀중 둘째로 태어났다. 허물어져가는 슬래브지붕의 단칸방. 말소리를 낮춰야했고 집주인 가족을 만나면 죄인처럼 고개를 숙여야 했던 사글세방이었다. 백일사진과 돌사진을 여자는 찍고 남자는 안찍는 줄 알았다. 누나는 있는데 나는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크고 나서 먹고 살만해졌을 때 어머니께서 내 손을 꼭 잡고 뜨거운 눈 물을 떨구면서 “미안하다. 네가 태어났을 때는 너무 가난해서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고 말씀하신 뒤에야 알았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를 원망하지 않는다. 이만큼 키워주신 게 어딘가? 아버지의 얼굴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아버지의 존재를 인식했을 때 아버지는 1년에 한두번 정도 집에 얼굴을 비추었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께서 집에 오시는 날이면 밖으로 도망가야했다. 아버지는 왠지 내게 엄하고 무서운 존재였다. ‘아버지’라는 단어에는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다. 하지만 아버지의 실물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결혼해서 아들을 낳는다면 나는 매일 쪽쪽 빨아줄 것이다. 그만큼 아버지의 사랑에 한이 맺혔다.

아버지는 회사에 다니다가 개인택시운전을 하셨다. 지금은 어떨지 몰라도 당시 개인택시를 몰면 꽤 벌이가 괜찮았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집 쌀독은 항상 바닥이 긁혔고 매일 주인의 집세 독촉으로 우리는 주눅들어 살아야했다.아버 지는 집에 생활비를 내놓지 않으셨고 그나마 내가 세살인가 네살때 집을 나 가셨다. 세 식구가 누워도 비좁은 단칸 사글세방. 그래서 매일밤 어머니의 흐느낌과 한숨소리를 자장가처럼 들어야했다. 누나는 수제비가 좋다고 한다. 하지만 나 는 지겹다. 멸치 몇마리에 신김치만 달랑 넣고 끓인 수제비는 지금 사람들에 겐 별미일지 모르지만 그걸로 매 끼니를 이어야했던 나로서는 그 밀가루냄새 만 맡아도 속이 울렁거렸으니까. 내 유년시절 기억의 창고를 열어보면 그속엔 슬픔과 눈물만 남아 있다.마치 어둠속에서 빛나는 보석처럼……. 


불어터진 우동 말라버린 꼼장어…
포장마차를 하셨던 어머니는
그나마도 우릴 위해 남겨두셨고…
 

연탄의 구멍이 모두 몇개인가. 19개. 그래서 예전에는 '십구공탄' 이라고 불렀다.  내가 코흘리개 시절에 아버지께서 집을 나가시자 우리 세식구는 경기도 고양군 벽제읍으로 이사했다. 아버지께서 1년에 한두번 집에 들러 던져주는 생활비로는 도저히 서울에서 살 수 없었기 때문에 집세가 더 싼 곳으로 옮긴 것이었다.  이사한지 얼마 안돼 어머니는 손수레 하나를 가져와 정성스레 수리를 했다. 우리 식구를 먹여살리기 위해 포장마차를 차린 것이다.


아버지가 두려움의 대명사였다면 어머니는 안락과 사랑의 표상이었다. 아들이라고 편애하고 딸이라고 구박하는 일 없이 진실누나와 나를 똑같이 대해줬다. 나는 무서운 아버지보다는 부드러운 어머니가 좋았다. 그때부터 아침저녁으로 내가 하던 일중의 하나는 연탄을 가는 거였다. 내 또래 아이들 대부분은 연탄이 뭔지 모른다. 그러니 연탄구멍 맞추는 법을 알 리가 있을까? 19개의 구멍을 이리저리 맞추다보면 머리가 띵하고 기침이 난다. 연탄가스를 많이 흡입했기 때문이다.


벽제의 사글세방은 집이라고 할 수 없었다. 겨울이면 이불을 서너겹 겹쳐 덮어도 이가 덜덜 떨렸다. 비닐로 막은 창문에는 하얗게 성애가 끼고 머리맡에 놓인 물그릇은 땡땡 얼어붙었다. 그런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우리 세식구는 부둥켜안고 잠을 잤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 나는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 일어날 수 없었다. 어린 나이지만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서있다는 것을 느꼈다. 간신히 입술을 움직여 ‘엄마’를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누나도 마찬가지였다. 마침 집세를 독촉하러 온 주인집 아주머니에 의해 우리는 병원으로 옮겨졌다. 연탄가스 중독.


간신히 살아난 그날 이후부터 우리는 아무리 추워도 문을 조금씩 열고 잤다. 죽음보다는 추위가 훨씬 낫기 때문이었다. 벽제는 지금 서울의 위성도시로 크게 발전했지만 그때만해도 허허벌판 시골이었다. 나는 동네 개구쟁이들과 어울려 여름이면 개울에서 천렵을 했고 겨울이면 산에 가서 덫을 놓아 토끼를 잡으며 철없이 뛰어놀았다.


배가 고프면 어머니가 포장마차에서 팔다 남은 음식을 먹었다. 불어터진 우동, 꺼멓게 말라버린 꼼장……. 어머니는 그나마도 자식들을 위해 남겨두셨다. 불쌍한 어머니. 지금도 포장마차 앞을 지나치면 그 시절의 일이 떠올라 눈앞이 흐려진다.

 차비 가져온다던 누나 소식 감감
단돈 50원없어 20리길 터벅터벅


제대로 연애해본 적도 없고 아직 미혼이지만 결혼은 해도 후회, 안해도 후회라는 것쯤은 안다. 뿐만 아니라 일단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으면 절대 이혼하면 안된다는 진리도 뼈저리게 깨달았다. 나는 아버지가 왜 우리를 버렸는지 잘 모른다. 또 아버지가 돈을 웬만큼 벌면서도 왜 항상 궁핍했는지도 모른다. 여자가 있었거나 아니면 노름을 좋아했던 것 같다. 내가 결혼을 할지 독신으로 살지는 잘 모르겠지만 만약 결혼을 한다면 정말 자상한 가장이 될 것이다. 물론 노름에 빠지는 일도, 한눈파는 일도 절대 없을 것이다.


나는 누나와 함께 벽제의 집에서 서울 은평구 불광동의 불광초등학교로 시외버스를 타고 통학을 했다. 당시 버스요금이 50원이었고 누나와 나는 매일 어머니께 100원씩 타서 다녔다.  나는 내 소지품을 잃는 법이 없었지만 누나는 덤벙대는 편이어서 뭐든지 잘 잃어버렸다. 누나는 오전반이고 나는 오후반이라 내가 교문에 들어설 즈음이면 누나는 교문을 나오곤 했다. 3학년 어느 여름날 교문앞에서 만난 누나는 핏기 없는 얼굴로 차비를 잃어버렸다고 했다.


나는 내 차비를 주며 일단 집에 가서 어머니께 차비를 받아서 내가 수업이 끝날 때를 맞춰 다시 학교로 오라고 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누나는 오지 않았다. 집에 전화가 없었기에 연락도 되지 않았다. 핸드폰이 있는 요즘 세상은 얼마나 편리한가?  그렇게 하염없이 기다렸지만 오후 6시가 넘어도 누나는 올 줄 몰랐다. 배가 고파진 나는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집에 도착하니 오후 10시가 다 됐다. 어머니는 어디서 놀다 이제야 들어왔느냐고 호되게 야단쳤다.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등뒤에서 누나가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누나는 야단맞을 게 두려워 돈을 잃어버렸다는 말을 차마 꺼내지 못했던 것이었다. 나는 끝내 입을 다물었다. 배가 고팠지만 친구네서 먹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저녁을 안먹었고 걸어오느라 늦었다는 얘기를 사실대로 말한다면 누나가 혼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단돈 50원이 없어 20리길을 터벅터벅 걸었던 아이. 그 불쌍한 모습이 내 어린 시절의 자화상이다.


데뷔앨범작업이 무산됐을때
난 소주를 병째 털어놓고 나갔다
차도에 서서 죽겠다고…그 순간

나는 지금까지 한번도 친구를 집에 데리고 와본 적이 없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창피함 때문에 그랬던 버릇이 어느덧 굳어져버린 것이다.  집안형편상 누나와 나는 당연히 도시락을 싸갈 수 없었다. 누나는 여자라 그런지 그게 너무 부끄러워 점심시간만 되면 슬며시 교실을 빠져나가 학교주변을 방황하다 오후수업이 시작될 즈음 나타나곤 했다.


지금과 달리 얼릴 때 나는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을 잘 탔다. 하지만 우리집이 가난해서 도시락을 못 싸온다는 것을 이미 친구들이 다 알고있는 상황이라 굳이 숨기려하지 않았다.  남학생중 상당수가 2교시나 3교시가 끝나면 도시락을 먹곤 했다. 그럴 때면 나도 호기롭게 달려들어 친구들의 도시락을 나눠먹었다. 그때 나와 친했던 녀석들의 집안형편은 나보다는 약간 낫긴 했지만 그래도 가난하긴 마찬가지였다.


알록달록한 잡곡밥에 열무김치가 고작이었지만 나는 그들에게 남다른 고마움을 느끼며 행복한 마음으로 주린 배를 불렸다. 지금도 그 녀석들과는 둘도 없이 친하다. 창조주가 내게서 아버지를 빼앗아간 대신 그들을 준 것같다.  친구얘기가 나온 김에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28세때의 우정얘기를 해야겠다. 내 데뷔앨범작업이 완전히 물건너간듯한 상황이 됐을 때 나는 하루하루를 스스로 파괴하며 절망의 나락으로 자신을 떼밀고 있었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얼마나 갈등했던가. 허무의 술잔을 기울이며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들던 그 무렵, 내 청춘의 모래시계는 적막의 공간속에 멈춰서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여느때와 다름없이 만취한 나는 친구녀석에게 죽고싶다는 말을 수없이 되뇌며 하소연을 했다. 녀석은 "웃기는 소리마라"며 나를 데리고 포장마차에 들어갔다. 소주 한병을 병째로 들이마신 나는 "이대로 죽겠다"며 갑자기 밖으로 뛰쳐나가 차도로 뛰어들었다.  시야에 자동차의 불빛이 가득 들어왔다. 짧은 순간 '이제 죽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생사의 기로에서 내가 떠올린 것은 '어머니'였다.


중학교시절 못살게 굴던 친구
돌멩이로 머리통 한방 먹인뒤
골목대장으로 '양아치' 생활

나를 향해 달려오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내 눈을 파고드는 순간 나는 이승과 저승을 넘나든 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곤 쓰러졌다.  정신을 차리고보니 친구가 이미 내 왼쪽뺨을 한대 갈긴 후였다. 친구는 "노래가 네 인생의 전부니? 어머니와 누나, 그리고 나를 비롯해 너를 좋아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노래에 비교하면 그렇게 하찮은 존재냐"며 울부짖었다.


그때 친구가 내 팔을 잡아끌어주지 않았다면 지금 나는 스카이라는 예명처럼 하늘나라에 있지 않을까? 그 친구는 류시원의 전 매니저인 이일우다. 지면을 통해서나마 뒤늦게 고마움을 표시한다.  일우야, 네 우정이 나를 '사람'으로 만들었고 또 가수로 성공시켰다. 영원히 잊지 않을게.


대성중학에 진학하면서 우리집은 불광동으로 이사를 했다. 그때까지도 내 성격은 여전히 내성적이고 말수가 적었다. 게다가 하얀 피부에 빠싹 말라서인지 나를 얕잡아보고 괴롭히는 동기생이 몇명 있었다. 그중 특히 한명이 심했다. 나는 처음에는 하소연도 못하고 혼자서 끙끙 앓았다. 하지만 결국 어머니에게 울면서 학교에 안다니겠다고 떼를 썼다. 어머니는 사내녀석이 왜 그리 연약하냐며 야단을 치셨다. "네가 괴롭힘을 당할 만큼 잘못했으면 달게 받아야하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당당히 맞서 싸워야한다"고 말씀하셨다.


참, 내가 생각해도 나는 엉뚱하다. 어머니의 그 말씀을 잘못 해석한 나는 책가방에 내 주먹의 두배쯤 되는 돌 하나를 넣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날 수업이 끝나고 계단을 내려오는데 그 친구가 또 내 뒤통수를 치고 엉덩이를 걷어차며 놀리는 것이었다.


나는 가방에서 돌을 꺼내 그 친구의 머리를 내리쳤다. 그 녀석은 통증과 함께 쏟아지는 피에 겁을 먹고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의기양양해진 나는 그를 향해 "또 괴롭히면 더 심하게 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후로 내 학교생활은 순탄했지만 나는 방과후 불광동 일대를 배회하면 청소년들에게 행패를 부리는 소위 '양아치' 생활을 잠깐 하게 됐다. 정말 철없던 때였다.

 

 손수레 끌다 땀 식히던 곳서
들려온 동네 선배 시타 소리는
내 인생의 전환점 알리는 전주곡


나는 초등학교때부터 돈벌이에 나섰다. 학비나 용돈마련을 위한 아르바이트가 아닌, 생계를 위한 몸부림이었다. 신문배달을 해서 매월 1만5천원씩 생활비를 보탰다.  중학교에 진학해서는 저녁과 새벽에 어머니의 포장마차 손수레를 끌어들이느라 신문배달을 할 수 없었다. 방과후면 집으로 달려가 손수레를 끌고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을 몇번 건너 동네중심가로 나갔다.


나는 늦잠이라곤 자본 기억이 없다. 어머니의 포장마차 영업이 끝날 즈음인 새벽 5시면 어김없이 졸린 눈을 비비며 다시 포장마차가 있는 곳으로 가서 손수레를 끌고 집으로 와야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어머니가 말아주시던 우동맛은 정말 잊지못한다. 그래서 내가 아직도 포장마차를 자주 찾는가보다. 중2때 동네 불량배들과 어울리면서도 저녁과 새벽에 손수레를 끄는 일은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나는 점점 싸움에 실력이 붙자 학교에서 아예 태권도반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발길질과 주먹질을 연습하기 시작해 학교대표 태권도시범단에 뽑힐 정도로 실력이 늘었고 공인 3단까지 올랐다.


그러던 어느날 저녁 어머니는 단단히 화난 표정으로 나를 꿇어앉혔다. '어제 밤에 동네 아주머니 한분이 포장마차로 찾아와 자기 아들이 불량배에게 얻어맞고 용돈을 빼앗겼는데 그 나쁜 깡패가 바로 당신 아들'이라고 하더라며 호되게 야단쳤다.


나는 눈물을 펑펑 쏟으며 잘못을 빌었다. 그런 작고 큰 일들이 내 주변에서 일어나던 중2때 정말 큰 일이 생겼다. 부모님이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은 것이었다. 불광동 뒷산으로 가면 독박골이라는 자그마한 계곡이 있다. 많지도 적지도 않은 계곡물이 흐르는 그곳은 여름에는 동네 개구쟁이들의 놀이터였고 더위를 피하려는 주민들의 쉼터였다.


 9월의 어느날 저녁, 어머니의 손수레를 끄느라 땀을 흘린 나는 더위를 식힐 겸 이곳을 찾았다. 고등학생쯤 돼보이는 어느 형이 기타를 치는 모습이 보였다. 석양빛을 등진 채 검은 실루엣으로 걸터앉아 지그시 눈을 감고 줄을 퉁기는 그 모습, 저녁하늘로 퍼져올라가던 그 감성의 멜로디는 내 인생의 전환점을 알리는 전주곡이었다.


기타 배우겠다" 학원장에 통사정
잔심부름하며 실력연자 '조교'기용
수강생과 가슴시린 첫사랑 빠져


다음날 나는 동네의 기타학원으로 달려갔다. 나중에 '사부'로 부르게된 학원장님을 붙잡고 무조건 사정을 했다. "기타를 배우고 싶지만 돈이 없습니다. 기타를 배울 수 있게만 해주신다면 눠든지 다 할게요"라고.

그날부터 나는 학원의 청소를 하고 사부의 잔심부름을 하며 기타를 배웠다. 일단 기초를 배운 다음 독학으로 각종 연주법을 익혀갔는데 내가 생각해도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실력이 늘었다. 이듬해에는 오히려 학원으로부터 돈을 받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조교'가 돼 있었다. 그리고 나는 가슴시린 첫사랑을 경험하게 된다.

당시 우리 동네에는 예일 선일 동명 등 여학교가 무려 4개나 있었다. 뽀얀 피부에 날씬하고 예쁘장하게 생겼던 당시의 나는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지만 정작 나 자신은 이성에 관심이 없었다.‘가장’이라는 생각에 어머니와 누나를 지키겠다는 책임감이 강했고 왠지 ‘의리’라는 단어에 강한 집착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중3때 만난 그 여학생 이정현은 달랐다. 그녀를 보는 순간 나는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나와 동갑내기인 그녀는 선일여중에 다니고 있었고 진실누나와도 잘 아는 사이였다. 그녀는 기타학원 수강생으로 내 제자인 셈이었다. 정현이는 조덕배의 ‘꿈에’를 무척 좋아했다. 나는 틈만 나면 정성스런 기타반주에 실어 ‘꿈에’를 불러 그녀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막상 ‘관심있다’ ‘좋아한다’는 등의 호감표시는 단 한마디도 해본 적이 없었다.

하루는 그녀가 학원에 늦게 온 적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밤10시가 돼서야 기타강습이 끝났고 자연스럽게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게 됐다. 20~30분쯤 걸렸을까? 단둘이 호젓한 밤길을 그렇게 걷는 동안 나는 단 한마디도 그녀에게 말을 걸 수 없었다.

가슴은 콩닥콩닥 방망이질을 해댔고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했으며 입술은 바짝바짝 메말라갔다. ‘이런 기회는 없다. 내 감정을 숨김없이 표현해야겠다’라고 머릿속은 꽉 찼지만 입술은 점점 굳어만갔다. 어느덧 그녀의 입에서 “집에 다 왔어”라는 말이 나왔다.



사랑의'ㅅ'자도 못꺼내본채 막내린 첫사랑
가혹했던 가정형편에 그건 사치였는지도…
난 키보드주자가 돈을 번다는 말에 솔깃


나는 "잘가…"라는 말한마디를 겨우 꺼내고는 발길을 돌렸다. 그녀의 집 철문이 꽝하고 닫히는 소리를 확인한 뒤 스스로 머리를 얼마나 쥐어박았던가!

어느덧 우리는 중학교 졸업을 코앞에 두게 됐다. 그해 크리스마스때 나는 큰 마음을 먹고 예쁜 머플러를 샀다. 당시 학원에서 학생들에게 기타를 가르쳐주는 대가로 '사부'로부터 2만원씩 월급을 받아 어머니께 생활비를 보태드렸던 나였기에 어머니로부터 '거금'을 타내는 것은 쉬웠다.

하지만 나는 용기가 없어 차마 내 손으로 직접 전하지 못해 고민했고 이런 사정을 잘 아는 사부가 대신 전해주겠다며 메신저역할을 자청하고 나섰다. 하지만 야속한 사부는 전해주면서 그 선물의 장본인이 나라고 밝히는 것을 깜빡 잊어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나의 첫사랑은 사랑의 ‘ㅅ’자도 꺼내보지 못한 채 사춘기와 함께 세월의 뒤편으로 흘러갔다.

나중에 탤런트가 되고나서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프로를 통해 그녀와 재회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예전의 청초한 소녀가 아니었다. 그래서 첫사랑의 추억은 추억으로만 마음속에 간직하라고 선배들이 얘기하는가보다.

전국 각지의 나이트클럽을 돌며 밴드마스터로 활동한 경력이 있는 ‘사부’는 내게 밤무대 밴드로 나서면 벌이가 괜찮다며 고교진학을 포기하고 함께 일할 것을 제의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우리는 집세를 한번도 제대로 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집주인에게 들볶이는 것엔 이력이 붙었다. 하지만 집 나간 아버지가 진 빚 때문에 시달림을 받는 것은 정말 참기 어려웠다. 하루 하루가 지옥같던 그 생활에서 하루빨리 탈출하고 싶었으며 어머니의 얼굴에서 가난의 때를 벗겨드리고 싶었던 나는 귀가 솔깃했다.

인적자원이 풍부해 밴드에 캐스팅되기 힘든 기타리스트 대신 희귀성 때문에 어느 곳에 가더라도 대접을 받는 키보드주자가 낫다는 사부의 충고에 나는 키보드를 구하러 종로2가 낙원상가로 갔다. 야마하제품의 그럭저럭 쓸만한 키보드를 골랐더니 가격이 무려 30만원.

무거운 발걸음을 돌리면서 앞으로 어떻게 식구들과 함게 살아갈지… 세상이 온통 어둡기만 했다. 내 가녀린 청춘의 어깨 너머 슬픔처럼 함박눈이 내리던 날이었다.



밤무대 악사 포기하고 고교진학
어떻게하면 돈벌수있을까 고민
번개처럼 머리스치는건 연예계


중학교 졸업앨범을 졸업후 몇 년이 지나서야 받았다는 누나의 인터뷰내용이 한때 장안의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예 없다. 뿐만 아니라 수학여행이라는 것을 가본 적도 없다. 누나와 나는 한가정에서 자랐지만 그래도 누나가 나보다 약간의 혜택을 누렸던 것 같다.

누나는 내게 너무나 소중한 존재다. 얼마나 고마운 사람인지 나는 항상 감사한다. 하지만 어릴 때 우리는 많이 싸웠다. 또 나보다 철없이구는 누나가 한없이 서운하기도 했다. 그 얘기를 해볼까.

중학교때 어머니의 포장마차를 끌고 한참 언덕을 올라가는데 저만치서 누나가 친구 서너명과 수다를 떨며 내려오는 게 보였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자연히 누나와 나는 눈이 마주쳤다.

나는 당연히 반가움에 입을 열려다가 갑자기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나와 뒤에서 수레를 미는 어머니를 발견한 누나는 화들짝 놀라는 표정이 역력했다. 잠깐동안 당황했던 누나는 이내 표정을 확 바꾸더니 등을 돌리고 수레를 지나갔다.

그날 저녁 나는 누나와 심하게 다퉜다. 누나라는 말도 안하고 ‘너’라고 표현하며 “네가 우리 가족 맞느냐”고 고함을 질렀다. 창피하다면 수레를 끄는 내가 더 창피했을텐데 식구를 외면하는 누나가 그렇게 야속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던 누나는 내가 방황하던 지난2년간 가장 커다란 힘이자 등불이 돼줬다. 그 당시 누나는 내 인생 최후의 보루이자 나의 가장 든든한 바람막이였다.

가수데뷔가 번번이 막히자 나는 유학을 결심했다. 그 배경에는 누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나는 “10년간 학비와 생활비를 보장하겠다”며 내게 용기를 북돋워줬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자. 밤무대 악사를 포기하고 대성고교에 진학한 나는 뭔가 다른 돈벌이를 찾아야했다. 고민하던 내가 번쩍하고 생각해낸 것은 바로 연예계였다.

당시 우리 친척중에는 방송연예계 관련인들이 많았다. 그중에 최상현 KBS 드라마국장이 바로 당숙(아버지의 사촌형). 나는 그 분을 찾아가 무작정 탤런트로 데뷔시켜달라고 부탁했다.



"가족 먹여살려야 한다" 출연 애원
단돈15만원에 삼성카메라CF데뷔

당숙께서 난감한 표정으로 한참 생각하시더니 "연기를 하고 싶다면 뭐든지 연기와 관련된 상을 3개 받은 뒤 찾아와라"며 잘라 말씀하셨다. 당시 나는 당숙이 그렇게 야속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중에 탤런트가 되고나서는 당숙의 입장을 이해함과 동시에 내가 얼마나 무모했던가를 깨닫게 됐다.

어쨌든 당시 크게 낙담한 나는 고민에 빠졌다. 내 양심을 걸고 자신있게 말하는데 연예인이 되고자한 것은 부귀영화를 누리거나 팬들에 둘러싸여 우쭐거리며 살겠다는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고 오로지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서였다.

온통 잿빛으로 변해버린 여의도의 하늘 아래서 손가락이 땅바닥에 닿을 듯 어깨를 늘어뜨리고 걷던 내 등을 툭 치는 사람이 있었다. 당시는 육촌형인 최재성이 탤런트 겸 영화배우로 한창 잘 나갈 때였다. 재성형의 친형이자 매니저인 재훈형이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재훈형은 "너는 얼굴이 곱상하니 CF모델을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며 충무로에 가면 광고에이전시들이 많으니 그곳을 뒤져보라고 귀띔해줬다.

나는 무작정 충무로에 나갔다. 건물마다 들어가 1층에 있는 간판을 훑어보곤 '모델 에이전시'라는 이름을 내건 사무실을 전부 뒤지며 "스타가 되고 싶어 온 게 아니다. 모델일을 해 돈을 벌어 집안식구를 먹여살리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하며 키워달라고 부탁하고 다녔다.

그러던 중 만난 사람이 조규형사장님. 지금은 잘나가는 매니저지만 당시만 해도 그는 책상 하나 달랑 들여놓은 자그마한 사무실에서 모델에이전시를 하고 있었다. 현재 청담동에 '이경민 헤오숍'이라는 커다란 미용실을 차려놓고 사업가로 성공한 이경민누나는 그 사무실의 메이크업 아티스트였다.

나는 보름동안 그 사무실로 출근하며 조사장님을 졸랐다. 결국 조사장님은 "너처럼 지겨운 놈은 처음 봤다"며 직원에게 "야, 얘 사진좀 찍어서 광고주들에게 돌려라"고 지시했다. 그로부터 한달뒤 주인집 전화로 연락이 왔다. 첫 CF출연은 삼성 미놀타카메라였다. 여러병중에 섞인 낵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단역이었지만 촬영이 끝나고 난 뒤 내가 받은 돈 15만원은 정말 어머어마한 거금이었다.

 


고교 휴학한후 힘든 공단생활을 거쳐
다시 모델 노크…한편에 2백만원급 성장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우리 가족을 지키겠노라며 어릴 때부터 가장노릇을 하느라 발버둥쳐봤지만 가계에 별 도움을 주지 못해 괴로웠던 나는 그 많은 돈을 받고 가슴이 터질듯 부풀어올랐다. 어머니는 봉투속의 돈을 세어보더니 감격스러워 쉴새없이 눈물을 뿌렸다. "어디, 어디"라며 호들갑을 떨던 누나는 아예 기절해 쓰러졌다. 당시 우리집 한달 생활비가 집세까지 모두 합해서 10만원이 채 안될 때였으니 얼마나 큰 액수였겠는가….

하지만 그것으로 우리 식구의 감격은 끝. 희한하게도 일이 끊겼다. 지금 같으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도움을 준 분에게 '인사치레'를 했었어야 하는 건데… 고등학교 1학년 1학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 우리집의 재정상태는 사글세방의 보증금이 밀린 집세로 다 날아가서 제로가 됐고 이웃집으로 쌀이며 김치를 얻으로 다녀야했다.

누나와 나는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둘중에 한명은 학교를 그만두는 게 이 난관을 이겨나가는 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가장으로서 "여자인 누나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학교를 정상적으로 끝마쳐야한다"고 강하게 의력을 피력했다. 결국 누나는 친구네 집으로 가서 학교를 계속 다녔고 어머니는 외할머니가 사는 서민아파트의 지하를 임시로 빌려 그곳에 우리 세간살이를 보관하며 더부살이를 했다.

나는 휴학계를 던지고 무작정 구로공단으로 갔다. 그때 가장 힘들게 고생했고 오른쪽 다리에 커다란 부상을 입었다. 그 얘기는 며칠뒤에 하기로 하고 모델생활에 관한 얘기를 계속해보겠다. 고2때 나는 다시 충무로를 이잡듯이 뒤졌고 그러한 노력과 성실성을 인정받아 활발하게 모델활동을 재개하게 됐다. 운도 많이 따랐던 것 같다.

누나는 여고졸업후 신라호텔에 취직, 안내데스크에서 일했다. 몇달이 지나자 나는 누나가 받는 월급의 3~4배에 달하는 2백만원이라는 액수를 광고 한편을 찍고 받아내는 꽤 잘나가는 모델이 돼있었다. 드리더 어머니는 오랫동안 몸의 일부처럼 달고 살던 포장마차를 처분했다. 이제 우리 식구의 입에서는 '사람사는 것처럼 산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가 됐다.



신인모델시절 인천에서 CF찍던날
유호정누나와 차비없어 뜬눈 밤샘
스태프 짐칸 쪼그리고 앉아 서울로


내가 정상의 모델이 되기 전 무명시절의 고생담 하나. 지금은 인기탤런트 이재룡형과 결혼해 행복하게 잘 살고있는 탤런트 유호정(31) 누나. 나이는 진실누나보다 한살 어리지만 생일이 빨라 학교를 1년 일찍 들어갔기 때문에 우리 누나와 친구처럼 지낸다.

신인모델이던 호정누나와 내가 인천 월미도로 광고회사의 승합차를 타고 코카콜라 광고를 찍으로 갔을 때의 일이다. 우리는 보조역할이었기 때문에 촬영이 일찍 끝났지만 주역모델의 촬영은 아직 멀기만 했다.

하지만 누나와 나는 인천에서 서울까지 돌아갈 차비가 없었기에 촬영이 끝날 때까지 무작정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처량한 우리를 더욱 비참하게 하려는지 비까지 주룩주룩 내렸다. 승합차안에서 그렇게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새벽 5시쯤 됐을까, 스태프가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웬 일? 우리가 앉을 자리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감독님의 눈치만 살폈다. 그러자 감독님은 우리가 불쌍해 보였던지 "어떡하든 자리를 만들어주라"고 지시했다. 결국 우리는 차량의 맨 뒤칸에 장비를 비집고 쪼그리고 앉아서 서울까지 갔다.

서울에 도착하니 아침해가 뜨고 있었다. 호정누나는 내게 "어린 나이에 고생이 참 많다"며 위로해줬다. 나는 "누나, 우리는 언제나 커서 제대로 대접을 받을까"라고 신세한탄을 했다.

누나는 "열심히 하면 언젠가는 잘 될거야. 그때 우리 자랑스럽게 만나자"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90년대 중반 호정누나와 나는 방송국에서 자주 마주쳤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비오는 날 새벽 승합차 짐칸에서 쪼그리고 앉아서 고생하던 그 순간이 떠올라 피식 웃곤 했다.

어느덧 나는 고3이 됐다. 어느날 퇴근후 집에 들어온 누나는 직장생활이 너무 힘들다며 회사(신라호텔)에 사표를 냈다고 말했다. 어머니와 나는 펄쩍 뛰었다. 누나와 내가 함께 벌었기에 이제 슬슬 먹고살만해지긴 했지만 누나의 결혼비용으로 쓸 돈을 한푼도 모아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델일 하고 싶었던 누나
"기회 달라"며 단식 시위
"힘들더라도 원망말라"
에이전시 돌며 홍보 나서

 

누나는 거짓말을 한 것이다. 직장생활이 힘들기보다는 모델일이 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누나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거짓말 하지마, 다쳐." 누나는 며칠 지나지 않아 본심을 드러냈다. "기회를 달라"며 내게 도움을 청했지만 나는 "말같잖은 소리 하지마. 그 얼굴로는 고생만 죽도록 할 것"이라며 일축했다.

그러자 누나는 머리를 싸매고 드러누웠다. 일종의 시위였다. 그렇게 한달간 꼼짝 않고 이부자리에 누워있었다. 어머니가 주는 밥상도 물리기 일쑤였다. 그러자 어머니가 나를 달래기 시작했다. "진영아, 쟤 저라다가 죽겠다. 바싹 마른 것 좀 봐라. 네가 좀 도와주면 안되겠니"라고.

나는 누나로부터 아무리 힘들고 고생스러워도 나를 절대 원망하지 말 것이며 꼭 견뎌내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다음에야 누나를 데리고 각 에이전시를 돌며 누나를 홍보했다. 내가 누나의 첫 매니저였던 셈이다. 하지만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누나는 내 눈치만 살폈다. 내가 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이곳저곳에 전화를 걸었다. 그러고도 한참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연락이 왔다.

누나는 차근차근 계단을 밟듯이 커나갔지만 워낙 쟁쟁한 여자모델과 여자탤런트들이 많은지라 3류모델의 틀을 쉽게 벗지 못했다. 그럴즈음 나는 두번째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 그녀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해 이름은 감추기로 한다. 그녀는 나보다 한살 어렸다. 먹고살기 위해 카메라앞에 섰던 나는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자 이제 이성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런 시절에 함께 모델일을 하던 그녀를 알게 됐다. 모 CF에 함께 출연하게 된 계기로 알게 된 그녀는 허황된 꿈에 젖어있지 않고 모델활동을 여느 일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전문직이라 여기며 묵묵히 일하는 여자였다.

하지만 나는 첫사랑 때와 마찬가지로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못하고 그녀의 곁을 맴돌기만 했다. 그런 내 가슴앓이가 암(?)으로 번질 무력 그녀는 충무로에서 사라졌다. 내 사랑의 역사는 그렇게 영원한 미숙아 상태로 추억의 인큐베이터 속에 보관돼 있다.


고교입학후 돈없어 곧 휴학 공장에 취직
한달12만원 받아 6만원 눈물겨운 저축


어디서부터 그해 겨울의 이야기를 해야 할까. 그 겨운엔 눈이 많이 내렸다고 시작할까. 수요일에도 금요일에도 온 세상을 뒤덮으며 아스피린 분말처럼 눈이 내렸다고….

투명한 햇살이 미치는 겨울의 한가운데 홀로 서 있었다. 사랑했던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나는 문득 혼자였다. 주머니는 비어 있었고 마음은 더욱 외로웠던 시절. 열여섯살 내 청춘의 비망록은 눈물로 시작된다. 대성고등학교에 입학했지만 교과서를 살 돈이 없어 빈가방만 들고 다녔다. 누나는 선일여고 3학년. 어머니가 두사람의 학비를 댈 수 없었기에 결국 내가 '휴학'의 길을 택했다. 꿈많은 나이에 나는 공장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래, 나는 '공돌이'였다. 누구의 인생엔들 어려움이 없을까마는 내 젊은날의 일기는 온통 슬픔으로 얼룩져 있다. 하루 일당은 4천원. 한달에 12만원을 받아서 방값 3만원과 식대 3만원을 제하면 6만원이 남는다. 그것이 내 저축의 전부였다.

사람들은 과거를 떠나 있을 때, 그리하여 그것을 추억하는 자리일때, 자신이 겪었던 고통의 시간들이 믿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잊지 못한다. 승산없는 방랑에 내 모든 것을 걸면서 끝없이 표류하던 그 이단(異端)의 낮과 밤을 나는 결코 저버릴 수 없다. 영원히 버림받은 것같았던 저 청춘의 나날들.

세월은 강이다. 우리는 그 보이지 않는 물살에 상처받고 쓰러지면서도 새롭게 다시 태어날 것을 믿으며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어떤 상처에도 새 살은 돋아나는 법이라고 프랑스의 시인 랭보는 이렇게 말했다. '오, 성(城)이여 계절이여, 상처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 내 환절기의 한때를 살다 날아간 '공돌이의 꿈'은 어쩌면 한마리의 나비였을까. 김민기의 노래에 '공장의 불빛'이라는 것이 있다. 근로현장에서 꽃다운 젊음을 바치고 스러져간 우리 시대의 가여운 딸들을 형상화한 내용이다. 이름하여 '공순이'

기름밥을 먹으며, 졸면서 미싱을 돌리다가 손가락이 잘려져나갔다는 우리의 딸들. 산업화 사회가 남긴 유산은 그들의 가슴에 피빛 진달래꽃으로 맺혀 있다. 나 역시도 그랬다. 운명처럼 다가오는 시간의 수레바퀴 앞에서 나는 초라한 '공돌이'일 뿐이었다.

공장서 15시간 노동임금 집세도 빠듯
기계에 무릎 다친후엔 풀빵으로 연명


공장에서의 생활이 시작됐다. 친구들이 가방을 들고 학교로 가는 그시간에 나는 망치로 고철을 두들기며 가엾은 내 청춘의 비애를 되새김질 하고 있었다.

구로공단 한 구석에 있는 그 공장은 기차바퀴 부속품을 만드는 곳이었다. 직원은 9명. 나는 정식 종업원에도 들지 못하는 '시다'였다.

아침 7시부터 일을 시작해 밤 10시가 돼야 끝났다. 작업을 마치면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향했다. 구로공단의 개천 미로처럼 헝클어진 골목길을 30분이나 걸어 올라간 산동네 숙소는 반칸짜리 '벌집'이었다. 비닐로 바람을 막은 창문에 아침마다 성에가 뽀얗게 내리고, 제대로 발을 뻗고 잘 수 없을 정도로 좁은 공간이었다. 한달 방세는 3만원. 그나마 방세 내기가 힘들었던 나는 식비를 줄이기 위해 방안에 라면을 쌓아 놓고 지냈다.

그러던 어느날 사고로 다리를 다쳤다. 쇠를 깎아내는 기계에 무릎이 끼여 15cm나 찢어지는 중상을 입었다. 의료보험이 있을 리 없었다. 그동안 모아놓은 돈을 털어 치료를 받았다. 20바늘을 꿰맨 후유증으로 걸을 수가 없었다. 다음날부터는 일도 못한 채 골방에 갇혀 지냈다. 처마끝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가 처량하게 들려왔다. 아, 내 인생이 이렇게 시들고마는 것인가.

그렇게 한달이 지났다. 주머니에 남은 것은 100원짜리 동전 2개뿐. 며칠을 굶고 나니 눈앞에 헛것이 보이는 것 같았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이를 악물고 몸을 추슬러 아랫동네로 향했다. 그러나 200원으로 살 수 있는 것우 풀빵 2개뿐. 일명 '노을빵'으로 불리는 커다란 빵을 2개 샀다. 속에는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은, 그야말로 밀가루 덩어리였다. 당장이라도 입에 넣고 싶을 만큼 배가 고팠지만 억지로 참았다.

집에 돌아와서 그것을 바가지에 넣고 물을 부어 죽처럼 불려서 먹었다. 그렇게 하면 분량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찌그러진 놋쇠 숟가락으로 죽을 퍼먹을 때 눈물이 흘러 내렸다. 죽 위에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다시 숟가락에 퍼담아 먹으면서 나는 이토록 비참하게 연명해야 하는 내 자신이 너무 싫었다. 눈물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나처럼 '진짜 눈물'을 섞어 빵을 먹어본 사람도 없을 것이다.

 

  
'남자는~' 카피 유행시키며
누나 최진실 CF톱스타 우뚝
'가장'자리 내준 나는 존재회의


나는 지금도 점심을 잘 못먹는다. 공장에서 일하며 습관으로 굳어진 탓이다. 점심시간이 되면 혼자서 공단 근처의 개천가로 가서 몸을 숨겼다. 돈을 아끼느라 밥을 굶는다는 사실이 창피했고 그렇다고 남의 눈에 띄는 곳에 있으면 '왜 밥을 안먹느냐'는 질문을 받을까봐 두려웠다. 시꺼먼 산업폐수로 가득찬 그 개천을 코앞에 두고 얼마나 헛구역질을 했던가….

그렇게 6개월동안 공원생활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무릎부상 때문에 사실상 쫓겨난 것이었다. 우리 세식구는 비록 사글세방이지만 다시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다. 그날밤 우리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1학년 2학기로 복학수속을 한 뒤 다시 충무로에 나갔다. 이번에는 빈손이 아니었다. 여름이면 빙과를, 겨울이면 군고무를 싸들고 에이전시사무실의 문을 두드렸고 모델출연료를 받고나면 꼭 '인사'를 했다. 성실성을 인정받아선지 진짜 내가 모델로서 자질이 뛰어나서인지 성공을 했고 누나까지 모델로 데뷔시켰다.

그러던 어느날 누나가 갑자기 스타덤에 올랐다. 모전자 CF에 주연으로 발탁돼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라는 카피를 유행시키며 광고계의 새별로 떠오른 것이다. 그리고는 영화 '남부군'에 출연한 뒤 안방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