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면의 자유] 은둔이 내겐 삶의 지혜를 주었다.-두번째 이야기
초등학교 땐 중학교에만 가면, 중학교 땐 고등학교에만 가면, 고등학교 땐 대학교에만 진학하면, 대학교 땐 군대에만 가면, 군대시절 땐 군 제대만 하면, 모든 마음의 상처가 자연스럽게 나으리라 철썩같이 믿었으나, 난 늘 제자리를 맴돌 뿐이였다.
20대 초반 나의 소원은 대학 교정 잔듸밭에 누워 맘 편히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전부였다.
10대 초반 부터 6년간 신체화 장애로 난 달리는 것에 극도의 불안과 공포를 느껴야만 했다. 난 이를 태연히 감춰야만 했고, 이런 나의 이중성에 대해 극도의 자기 혐오에 빠져들곤 했다. 혁대로 등과 배를 채찍질하여 생채기가 날 정도로 자기를 벌 주지 않으면 내 폭력성은 쉽게는 삭혀지지 않았다. 이러면서도 늘 겉으론 모범생 착한 아이로 보여야만 했다. 중학교 1학년 담임 선생님을 성적인 대상으로 여기는 자신을 혐오하면서도 자위를 하는 내 자신이 벌레만도 못한 존재같아 견딜 수 없었다. 차곡 차곡 내면의 상처와 심리적 타격이 쌓여나가고 있었다.
나의 더러운 내면이 간파당할 것만 같아 혼자서는 맑고 투명한 하늘과 세상의 모든 창을 쳐다볼 수 없게 되었다. 심지어는 갓난 아이의 눈조차 두려워하게 되었다. 점차 밝은 곳을 두려워하고 낮을 피해 밤 속으로 숨어들기 시작했다. 마치 드라큐라처럼...
아버지는 44년 전남 보성에서 출생하셨다. 새로 생긴 여자 문제로 자식과 조강지처를 버린 친조부를 기억조차 하기 싫으셨던 까닭에서일까? 초등학교 숙제로 겨우 겨우 호적 등본에서 친조부의 이름 석자를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집안을 일으켜 세우겠다는 일념이 강하여, 자신의 꿈 보다는 현실적인 밥벌이를 선택하셨다. 위로 두 분 형님과 어머니께 피해주지 않기 위해 군에 입대하여 맹호 부대 일원이 되어 월남전에 참전하셨다.
어머니는 호적상으로는 51년 생이지만 실제로는 49년도에 출생했다. 당시 정서상 나이를 줄여 호적에
신고하는 것은 그리 낯설지 않은 우리네 풍경이였다. 독립 운동을 하셨던 외할아버지는 가족의 반대에
부딛쳐 사랑하는 아내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치 귀여운 딸을 지키지 못하셨다.
외할머니께선 모진 풍파 다 겪으시며, 행상으로 가정을 어렵게 어렵게 꾸려나갔다. 아버지 역할 모델이
없었던 어머니는 당신의 외삼촌을 아버지로 여기며 성장해 나가기 시작했다. 안으로 안으로만 꾹꾹 인
내하는 외할머니의 모습은 어머니의 성장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모방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외할머니는 애비 없이 자라 버릇이 없다는 소리, 애비 없이 자라 기본이 않되어 있다는 소리를 자식들에
게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남의 도움 바라지 않고 늘 억척스럽게 생존을 위해 가장 낮은 자리에 임하며 살으셨다.
1976년 8월 내가 출생한 지 1년이 지난 무렵 부모님의 다정한 모습.
결혼 이후에도 늘 집안을 돌봐야한다는 강박적 사고가 아버지를 지배했다. 아버지는 효자 소리는 들으셨지만 결코 아내와 자식에게 좋은 남편일 수는 없었다. 어머니는 자신의 결혼 반지까지 빼서 시댁을 도왔지만 늘 돌아오는 소리는 "결혼 하더니 사람이 변했어. 자고로 사람을 잘 만나야만 한다더니."였으므로
심기 편할 날이 없었다.
어머니가 아버지와 시댁 사이에서 스트레스를 받을 때 마다, 그 여파는 어린 내게까지 고스란히 전해졌다. 시댁과의 갈등이 극심해져 어머니가 시댁 소리만 나와도 두드러기가 생길 정도가 되자 어린 나의 친가에 대한 반감은 극에 달했다.
어느날, 살려달라고 외치는 어머니의 간절한 외침에 곤하게 자는 삼남매를 깨웠다.
난 안방에서 아버지가 부부 싸움 끝에 홧김에 어머니의 몸에 올라타고 목을 조르는 모습을 보고야 말았다. 이때 어찌나 큰 충격을 받았던지, 이후로는 아버지가 너무도 낯설고 부끄럽게 어겨졌다. 아버지가 하는 말은 모두 듣기 싫어졌다.
이 사건 얼마 지나지 않아,
동네 슈퍼 마켓에서 어머니와 함께 물건을 고르고 있을 때 한 여인이 머리를 산발하고
"누가 나 좀 살려줘요 저 미친놈이 나를 죽이려고..."
"나 좀 숨겨줘요"
고 외치며 맨발로 뛰어 든 일이 있었다.
머리 산발한 여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여서 진짜 얼마 지나지 않아 서슬퍼런 식칼을 휘두르며 웬 남자가 씩씩거리며 들이닥쳤다.
가게 주인 아주머니와 어머니의 재치 덕분에 무탈하긴 했으나 , 당시 어머니과 나는 서로를 얼싸안고 벌벌떨었던 것이 사실이다. 어려서부터 나를 아껴주셨던 어르신들의 죽음을 숱하게 보고 자랐으나, 그것은 결국 남의 일이여서 죽음이란 것이 그 지독한 공포와 두려움이 피부에까지 와닿지는 못했다. 이때 만큼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과 불안이 내 전신을 꽁꽁 얼어 붙게 만들었던 때가 또 없었다. 다행히 그날 불쌍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당시 어머니는 나를 품에 안고 자신의 등을 식칼 든 사내에게 향했다. 이 때 내가 느꼈던 따스한 마음과 죽음 앞에서도 자식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는 어머니의 깊디 깊은 정은 이후로 내 정서에 큰 영향을 주었다.
어머니는 한없이 자애로웠고 약자였으며, 아버지는 강자였고 또 어머니를 괴롭히고 눈물 흘리게 만드는 데 앞장서고 있다는 인식이 어린 내게 뿌리 깊게 자리 잡기 시작했다. 나는 어머니와 외할머니는 긍정적 존재로 아버지와 친가 사람들은 부정적 존재로 싸잡아 함부로 판단하는 흑백논리에 사로잡혀 있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외할머니도 친할머니도 모두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임을 어린 나는 알 수도 없었을 뿐더러 굳이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알려주는 이도 없었다. 고도 성장을 지속하고 있는 한국에서 정작 가족 간에 삶의 지혜를 나누지 못했다는 사실은 지금와 생각해 봐도 너무도 슬픈 우리 자화상이 아닌가 싶다. 이때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의 아픔을 자식들과 함께 나누었더라면, 좀 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몸짓으로 표현해 주시고 또 보듬어 주셨더라면 영화 빽투더퓨처의 설정 처럼 미래가 바뀌었을 텐데라며 안타까운 생각도 든다.
-이해할 수 없다면 용서 자체가 어렵다.-
형의 어릴 적 모습
형은 어려서부터 강단이 있었고, 화가 나면 그때 그때 풀어버리는 성격이라 늘 부럽기도 하였지만, 항상 밖으로 쏘다니길 좋아했다. 위로 너덧살 많은 형들과 어울리는 일은 다반사였고, 워낙 친구 사귀길 좋아해서 아주 먼 곳까지 돌아다녔으므로 늘 어머니의 근심을 사곤했다. 어머니가 걱정하시는 모습은 어떻게서는 보이지 않으려 했던 나는 자연 나의 온갖 욕망을 차츰 감추기 시작했다. 밖에 나가기 보다는 독서를 즐기고 집 안에서, 밖에서 놀 일이 생기더라도 어머니가 부르면 언제든 달려갈 수 있는 거리에서 놀려고 의식적으로 애를 쓰게 되었다.
어머니는 종종 나를 머리 맡에 앉히시곤 이렇게 말씀하곤 하셨다.
"성일아, 너 만은 어미 속을 썩이지 마라. 네 아버지는 우유부단하고 네 형은 저리 밖으로만 나도니 너 만은 제발 어미 속좀 썩이지 말아라"
형이 그때 그때 화를 푸는 방식과는 달리, 나는 화가 나도 그저 꾹꾹 눌러 참기만 할 뿐,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이것이 어머니께 걱정을 덜 끼치는 일이라고 철썩같이 믿었던 것이다.이렇게 꾹꾹 참다가 사지가 뒤틀리고 마음이 미칠것만 같아 정 못참을 성싶으면 아무도 모르게 방문을 잠그고 혁대로 배와 등을 생채기 나게 채찍질하곤 했다. 때론 죄 없는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를 괴롭히기도 했다. 강아지는 아픔으로 낑낑대면서도 내게 꼬리치곤 했다. 이런 날은 불쌍한 강아지를 괴롭혔다는 자책감에 더 자기 자신을 학대하곤 했다. 반대로 강아지가 으르렁거리기라도 하는 날이면 그것이 밉쌀스럽다고 더 괘씸하게 여기곤했다.
그저 꾹꾹 참고 인내한다고 해서 스트레스가 사라지고 상처가 승화되는 것은 결코 아니였다.
나의 유치원 시절
형과 누나는 내가 유치원 다니는 것을 매우 부러워했다. 나의 기쁨은 형과 누나의 슬픔을 자극하고
내가 유치원 다닌다는 우월감은 형과 누나 막내 동생만 부모님이 편애한다는 질투심과 열등감을 유발
시켰다.
한번은 이런 적도 있었다. 늘 사람들과 사이 좋게 지내고, 할 말 다하면서 어머니와 누나, 그리고 내게 말로 행동으로 상처주는 형이 어린 마음에도 미웠던지 어느 추운 겨울 난로열에 시뻘겋게 뜨거워진 쇠젓가락을 형 얼굴에 갖다대며
"형아 뜨거워?"
라며 천연덕스럽게 물어본 적도 있다. 물론 형은 화상을 입었고 나를 혼내킬 생각조차 까마득히 잊었을 정도로 깜짝 놀랐다.
이 사건 이후 어머니께 호되게 경을 쳤으므로, 형에 대한 동경과 미움은 좀 더 교묘하고 세련되게 감추어진 형태로 자리잡게 되었다.
06년 보라매 공원에서 여자 친구가 사랑의 도시락으로 날 감동시켰던 날. 사랑의 도시락.
이 날 여자 친구와 나는 서로를 얼싸안고 엉엉 울었다. 사랑 한 번 못 해볼 줄 알았던 내 여자 친구와
30년 넘게 사는 동안 제대로 된 연애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늘 짝사랑만 늘 헛물만 켜온 나의 만남은 자체가 영화스럽다.
여자 친구에게 그 흔한 영화 한번 보여주지 못한 내가 "사랑한다면 춤을 춰라" 연인 초대 이벤트에 글을 써서 당선되었을 때, 여자 친구는 매우 기뻐했다. 여자 친구가 공연장에서 얼마나 기뻐하고 또 신나했는지 또 관객 중 춤을 잘 춰서 티켓 한장을 선물로 받았던 추억은 너무도 생생하게 다가온다.
당시 이벤트에 신청했던 글 전문
♥스물네해 사랑 한번 못해볼 거라 여겼던 그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이해해 줄 남자를 만날 수 없으리라 여겼던 그녀와 어딘가에 있을 단 한 사람을 그리워하면서도 다가가지 못하는 서른 두해를 보낸 한 남자가 서로 마음의 문을 열고 크고 작은 오해와 갈등 등 맺힌 것들을 사랑으로 신뢰로 솔직한 대화로 알콩달콩 아기자기한 사랑을 키워나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자존심 때문에 부끄러움 때문에 사랑한다 말할 수 없던 저, 사랑이 떠나갈까봐 진정한 자아를 표현하지 못했던 저, 구속과 속박을 질투를 사랑으로 착각했던 저, 이젠 그녀의 아픔, 고통, 그림자까지를 그녀의 장점뿐만 아니라 단점까지도 포용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사랑임을 눈뜨게 되었습니다. 이미지가 아닌 그녀 자체를 이해하려는 발버둥이 너무도 절실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제가 시민단체 활동을 하고 있는 관계로 늘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아 선물하나 건넬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한 때 뮤지컬 배우를 꿈꾸기도 했습니다. 그녀에게 뮤지컬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 저도 함께 하고 싶습니다. 자판기 커피 한잔으로도 행복해 하는 그녀, 도시락 데이트를 하며 미안해하는 제게 늘 따사로운 미소로 진정한 마음을 건네는 그녀, 어느 날 가벼운 지갑으로 고민하던 제게 살며시 천원짜리 몇 장을 건네주던 그녀의 따스한 손길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어느 무덥던 여름 날 그녀가 싸온 도시락을 펴보니 앙증맞게도 홍당무가 어여쁜 하트 모양으로 저를 반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전 마음 저 깊은 곳에서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이 제 마음과 정신을 온화하게 아니 격렬하게 다독여주는 생생한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너무도 고맙고 너무도 감사하여 눈가에 이슬이 맺혔습니다.
많은 이들이 저를 철인(아이언맨: 신체가 철과 같이 단단한 이, 철학자: 어려서부터 심신의 조화를 꿈꿨던 내가 인터넷 상에서 즐겨 사용하는 닉네임)이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 저도 연약한 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답니다.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고 이런 저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서도 어느샌가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눈물 범벅이 되어 그래도 좋다고 저희 두사람 행복하게 웃을 수 있었습니다. 마음 속 정말 많은 응어리들이 햇살에 봄눈 녹듯 사라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희 두 사람은 행복이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닌 정말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가까이 존재함 알게 되었답니다. 그녀와 함께 뮤지컬 관람하고 싶습니다. 저희 커플에게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제가 정녕 올바른 길이라 선택한 길을 사랑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도록 열과 성을 다해 저를 이해해주고 아껴주는 그녀. 수채화 교실 강사로 봉사활동을 하며 제게 큰 힘이 되어주는 그녀, 전 지금 이 순간 지상 최고의 행복을 느끼고 있답니다.♥
302명의 사연을 써보낸 이 중에서 5명 안에 들어 댄스컬 사랑하면 춤을 춰라 티켓을 거머쥐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은둔이 내겐 삶의 지혜를 주었다.-3편에서 계속...
2007년 1월 16일 아이언맨 안성일 올림
[ATs 내면의 자유] 행복은 저 멀리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는 달라이 라마에게 물으려고, 소설가 이외수 씨께 물으려고 법정 스님께, 이해인 수녀님께, 소위 의식이 깨어있다는 분들께 물으려고 했던 적이 있습니다. 허나, 후일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있는 그대로의 나를 수용해 줄 이는 먼 곳에 있지 아니하고 바로 내 가장 가까이 존재했음을 말입니다. 그는 바로 저이니까요. 그래서 묻지 않았습니다. 이미 제 마음에 그 온전한 답이 존재하고 있었으니까요. 아주 오래전 부터 제가 아주 어렸을 때 부터. 이 마음의 선물은 제가 자신에게 마음의 문을 열고 다가와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두팔 벌려 맘껏 껴안아 주세요.
내가 미워하고 싫어하는 모습도, 내가 감추고 싶은 내 부끄러운 모습도,
정말 생각 조차 떠올리기 싫은 내 추악한 모습까지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과 존중, 그리고 칭찬으로
따뜻하게 보듬을 때 꽁꽁 얼었던 내면이 차츰 녹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 과정은 고통스럽지만
분명 내면의 자유는 찾아들 것입니다."
'지식혁명' 카테고리의 다른 글
1379 통합신고 센터 (0) | 2007.02.12 |
---|---|
[스크랩] “정부민원 ☎110번으로 해결하세요” (0) | 2007.02.12 |
착한 사람이 화낼 때 더 무서운 이유? (0) | 2007.02.08 |
서울, 독거노인.장애인 복지 수혜인원 늘린다. (0) | 2007.02.08 |
중증장애인..활동보조인.. 서비스 4월 시행 (0) | 2007.0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