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취재얼굴 밝힌 어느 에이즈 감염자의 ‘이유 있는 절규’
 
 
 [472호] 1998년 11월 12일 (목) 丁喜相 기자 
 
 
에이즈 감염자 박광서씨(26·서울)가 자살 유혹과 사회에 대한 뿌리 깊은 증오심에서 비로소 ‘해방된’ 날은 10월19일이었다. 그날 그는 에이즈 감염자들에게 천형처럼 따라다니는 ‘감염 사실 노출 공포증’을 스스로 벗어 던지는 길을 택했다. 양심 선언과 사회와 보건 당국을 향한 절규라는 두 가지 카드를 들고 <시사저널> 편집국을 찾아온 박씨는 이렇게 말했다.

“더 이상 잃을 것도 내쫓길 곳도 없는 삶을 유지하고 싶지 않다. 감염자의 밥과 잠자리와 인권, 무방비 상태에 놓인 일반인들의 감염 방지를 위해 ‘에이즈 감염자 박광서’의 얼굴과 이름을 공개해 줄 것을 요청한다.”

그는 이어 육신이 건강한 에이즈 감염자는 대한민국 어디에서 살아야 하는지 정부와 국민에게 묻고 싶다며, 자기가 벼랑 끝으로 내몰린 채 생존을 위해 드나들 수밖에 없었던 에이즈 전파 위험 지대가 어디인지 밝혔다.

찜질방·휴게텔에서 목격한 집단 동성 연애

4년 전 교통 사고를 당해 병원에 실려갔다가 우연히 감염 사실을 알게 된 박씨가 그간 살아온 삶은 말 그대로 형극의 길이었다. 외모로 보아서는 여느 건강한 20대 청년과 달라 보이지 않는(에이즈는 감염된 지 평균 10년 후에 발병함) 박씨에게 목숨은 모질기만 했다. 보건 당국의 ‘실수’로 고향에 감염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그는 사회로부터 버림받았다. 이후 스스로 인생을 개척하고자 해도 그가 발을 디딜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가는 곳마다 그는 ‘시체만도 못한’ 취급을 받았다. 결국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던 그가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은 ‘음습한 지대’ 뿐이었다.

10월26일 기자는 박광서씨와 함께 그가 에이즈 전파 위험 지대로 지목한 현장을 찾아 나섰다. 이날 자정 무렵 서울 영등포역 옆 ㄷ빌딩 3층에 위치한 남성 전용 찜질방은 백여 명의 이용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대부분 남성 동성애자들이지만 날씨가 추워지자 한뎃잠을 피해 들어온 노숙자도 꽤 된다는 것이 인근 주민의 말이었다. 하룻밤 이용료가 5천원으로 비교적 싸기 때문이다.

외견상 여느 사우나 시설과 똑같아 보이는 그 찜질방은 그러나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분위기가 영 딴판이었다. 이곳 저곳에서 3∼4명 단위로 뒤엉켜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난교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방은 모두 5개인데 방마다 20∼30명씩 들어가 온통 난교에 열중이었다. 기자가 몸을 씻고 찜질방 구석에 자리를 잡으니 옆에서 난교를 행하던 2명의 남성이 금방 성폭행을 하려 들었다. 이들을 뿌리치자 다른 10대 후반 남성이 자기 사진을 건네며 유혹하기 시작했다. 이들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도, 에이즈 예방 조처(콘돔)도 없었다.

이날 현장을 안내한 박씨는 “이용자들 가운데 누가 에이즈 감염자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잘 곳이 없어 이곳을 찾았지만 양심상 이런 시설에 오고 싶지 않다. 그러나 감염자가 달리 갈 곳이 없다”라고 말했다. 찜질방 이용자 가운데는 ‘바이’(이성애와 동성애를 함께 하는 사람)도 많다고 했다.

30분 후쯤 찜질방을 나서자 계단으로 경찰관 10여 명이 뛰어 올라왔다. 2층 당구장에서 폭행 신고가 들어왔다고 했다. 출동한 경찰에게 기자가 목격한 3층의 실태를 들려 주며 왜 단속을 않느냐고 물었다. 그 경찰관은 ‘출동해 봐야 난교하던 사람들이 자는 척 해 버리기 때문에 도리가 없다’면서 사실상 알고서도 묵인한다는 사실을 시인했다.
이튿날 밤 박씨의 안내로 동대문 근처에 있는 또 다른 시설을 찾았다. ‘ㅇ휴게텔’이라고 간판을 단 이곳은 화장실에 샤워 시설만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노래방 같은 구조의 방이 8개 있었다. 방 안에는 싱글 침대가 하나씩 놓여 있었는데 방마다 역시 남성들이 뒤엉켜 난교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날 밤 그곳 이용자는 약 50여 명.

<시사저널> 취재진이 추적한 바에 따르면 서울에만 이런 시설이 10여 곳에 이른다. 각 업소마다 자연스런 역할 분담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영등포의 찜질방은 값이 가장 싸서 10대부터 50대까지 모든 연령층이 이용하고, 이태원에 있는 ‘ㅇ찜질방’은 주로 20대 초반 남성들이 찾는다. 장충동에 있는 ‘ㅇ사우나’는 30대 남성을 주요 고객으로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