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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뻔한 영화 "님은 먼 곳에"

우리다운 2008. 9. 7. 14:20

[김원의 문화불評] 뻔뻔한 영화 '님은 먼 곳에'

김원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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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님은 먼 곳에>는 ‘대한민국’을 이어온 그 모든 가치를 비웃는다. 풍자가 아니다. 나름대로 미화하고 추켜세웠는데, 자신이 비웃고 있는지도 모른 채 조롱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렸다. 전쟁이 우습다. ‘전선’과 ‘전우’가 우습다. ‘정절’이 우습다. ‘사랑’이 우습다. 이토록 온몸이 가렵게 우스운 영화가 또 있으랴 싶다. 하하하!

역사상 위기의 순간마다 한국 여자에게 있어 한국 남자는 ‘님’이 아니라 ‘남’이었다. 아니 남만도 못한 존재이기 일쑤였다.
까마득한 옛날부터 여자를 조공으로 바쳐가며 평화를 유지하고, 전쟁이 터지면 여자들부터 끌고 가는 식민 지배를 당한 ‘약소국’이었기 때문이다. ‘후방’을 지키기 위해 여자들은 처절하게 유린당했다. 일본군 위안부는 그런 우리 역사에서도 가장 치욕스럽고 가장 쓰라린 과거다. 아니 치유는커녕 아직도 공식 사과조차 없으므로 엄연한 현재다.

청산 못한 과거는 내면화를 거쳐 美化 된다

과거를 왜곡한 채 제대로 바로잡지 못하면 곧 미래 세대의 정신까지 좀먹는다. 우리는 역사의 빚을 청산하지 못함으로써, 일본의 통치 수법을 저도 모르게 켜켜이 내면화해버렸다.
2004년 초 연기자 이승연이 화보집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일본군 위안부를 ‘콘셉트’로 일제 의 상징인 ‘욱일기’ 배경으로 그것도 삼일절 출간을 목표로 찍은 누드가 세상에서 제일 섹시하다는 발상이었다. 우리는 역사의 부메랑을 받은 셈이었다. 분명 누군가의 이익을 염두에 둔 조직적 행위였다. 카메라에 잡힌 ‘모델’은 돌을 맞았지만, 카메라 너머에 있는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은 이승연 뒤로 철저히 감춰졌다. 팔라우와 일본, 네팔까지 가서 “예술작품”을 찍었다는 제작사 네티앙엔터테인먼트와 사진작가 지영빈 ․ 김상곤, CF 감독 윤신영, 한복 디자이너 이영희 등을 포함한 스태프들은 이후 언급조차 되지 않는 면책특권을 받았다. 죄인은 카메라에 잡힌 그녀 혼자였다.

이 화보는 ‘(위안부 할머니들께) 상처가 될 줄 몰랐다’는 뻔뻔함으로 배포 직전까지 갔었다. 일본에서도 감히 상상 못할 파렴치함을 대한민국의 ‘최고’ 영상 종사자들이 기획했다. 우리 할머니들이 당한 것은 국가 차원의 폭력이었지 ‘섹스’가 아니었다. 그것을 섹스판타지로 치환시키려했던 놀라운 왜곡의 세대가 이미 대한민국 곳곳에서 ‘중견’이 됐다. 제작진의 ‘이승연 파문’ 이후를 검색해보면, 이들이 여전히 굴곡 없는 최고수로 대우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화 <님은 먼 곳에> 또한 그 연장선상에 있는 영화다. 여자를 병영 깊숙이 끌어들여 성노예로 만드는 것, 그것을 ‘자발성’이라는 아전인수로 정당화하려는 발상이 2시간짜리 영화가 됐다. 김태웅의 연극 <이(爾)>를 영화화 한 <왕의 남자> 제작진이 만들었다. 천만관객 동원 ‘신화’의 주인공 이준익 감독-최석환 작가 콤비가 그간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흥행과 상관없이 하고 싶어서 만들었고, ‘감’이 좋은 상태로 작업했다고 만족했다. 그랬다. ‘화면’은 예뻤다. ‘노래’는 맛깔스러웠다. 여주인공 순이(수애 분)는 더할 수 없이 어여뻤고 짓밟혀도 꺾이지 않을 고결함까지 갖췄다. 그러나 순이는 ‘벙어리’나 ‘귀머거리’ 신세였다. 시집에서도 친정에서도 받아주지 않아, 목숨을 건 면회를 가야하는 살아도 죽은 목숨이었다.

정작 남편은 받아주지 않는 몸, 그러나 뭇 사내들이 침 흘리며 탐하는 그녀의 몸과 목소리가 영화를 떠받친다. 그렇다. 군대 ‘위문단’에 필요한 것은 단지 생물학적인 여체뿐이었다. 노래실력이나 춤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젊은 군인들이 바라는 것은 그저 살아있는 젊은 여자의 살덩이가 눈앞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 ‘여자’의 그토록 싱싱하고 아름다운 육체는 하필 출전 중인 군인의 아내라는 트릭에 가려져 있다. 그것으로 집단 성희롱과 성폭력의 혐의를 교묘히 비껴가려 한다.
그러나 이 설정은 우리가 딛고 선 삶의 기반 자체를 무너뜨린다. “부모형제 나를 믿고 단잠을 이룬다”는 군가를 철석같이 믿었던 ‘진짜 사나이’들의 최후의 보루가 무너졌다. 단잠을 이루고 있을 줄 알았던 식구가 최전방까지 몸 버려가며 ‘면회’옴으로써 본말이 전도됐다. ‘남자’에겐 목숨을 걸고 전선을 지켜내야 할 명분이 사라졌다. 이 영화를 향해 묻고 싶다. ‘남자’는 왜, 누구를 위해 전쟁터로 나가는가?

희생양의 ‘자발성’이라는 뻔뻔함 <님은 먼 곳에>

물론 남의 나라 독립전쟁에 끼여든 것 자체가 명분 없는 전쟁일 수 있다. 그래서 월남전은 그 모든 불합리를 정당화시킬 수 있다는 게 제작진의 의도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가도 너무 갔다. 가치 전도된 ‘3대독자 구하기’는, 파렴치할 정도로 ‘목숨’만을 구걸한다. 삶은 곧 치욕이니, 다만 살아남는 것만이 선(善)이다.
그러나 그렇게 악착같이 살아남아도 ‘돌아온 김상사’들에게는 갈 곳이 없어졌다. ‘후방’을 지키며 미래의 싹을 마련했어야 했던 ‘아내’가 전장으로 간 탓이다. 손에 쥐어진 몇 푼의 달러만이 그 대가였다. 그래서 ‘남자’들은 ‘여자’에 대한 죄의식으로 미군들이 준 달러를 태운다. 돈 때문에 갔으면서 ‘양심’ 때문에 돈을 태운다는 거짓부렁이다. 그 장면이야말로 가장 졸렬한 변명이었다. 불쾌했다. 그들에게는 돈을 함부로 태울 자격이 없다. 그녀가 어떻게 번 돈인데, 감히 누가 누구 앞에서 정의로운 척 하는가?

말없는 순이는 눈물만 글썽인다. 그녀에게는 침묵할 수 있는 자유뿐이다. 폭력이 정당화 되고 일상화 된 세상, 폭력이 폭력인지도 모르는 세상을 그녀는 말없음으로 간신히 견뎌내고 있다. 양아치와 마초 군인들만 설치는 곳에서 ‘여자’의 용도는 단 하나라는 암묵적 합의가 그녀의 몸을 노리고 있다. 순이를 가수로만 대접해 준 것은 오직 월맹군뿐이었다.
곳곳에서 총질과 포탄세례를 당하는 대한민국 육군의 활약은 하도 눈부셔 허황됐다. 남편 박상길 일병(엄태웅 분)은 월남전에 ‘출전’한 것이 아니라 ‘대한 늬우스’에 ‘출연’하러 간 듯했다.

그럼에도 끝끝내 순이의 자의식은 발동되지 않는다. 그녀는 그래서 마네킹에 가깝다. 그럴수록 점점 더 예뻐진다. 그녀의 아름다움이 최고조에 이른 순간, 그녀의 미모는 미인계에 제대로 쓰인다. 그 모든 게 그녀의 ‘초 자발성’이었기에 아무도 막지 못한다.

그게 ‘사랑’이어야, ‘건국60년-기적의 역사’가 가능하다?

전장에서 전우들의 죽음을 겪으며 ‘정신 나간’ 남자와 이미 내돌릴 대로 내돌려 ‘깨진 항아리’가 된 여자는, 과연 앞으로 ‘늦기전에’ ‘사랑’하면서 살 수 있을 것인가?
관객이 그들 부부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영화는 ‘전쟁통’이 모든 것을 정당화시켜준다고 주장하고 있으니까.

우리 현대사가 오직 ‘전쟁통’과 극복과정만 있고 ‘독재’와 ‘민주화’ 따위는 없었다는 광복 63주년, ‘대한민국 건국 60’년의 논리는 이 영화에도 있다. 베트남이 그렇게 ‘사지(死地)’였는지 몰랐다, 아내는 남편 면회하러 심지어 ‘위문단’에 껴야 하는지 몰랐다. 한 남자의 아내 될 자격은 뭇 사내를 홀릴 재색에서 온다는 것은 더더욱 몰랐다.
월남 참전 용사가 대한민국 ‘기적’을 이뤄낸 ‘위대한’ 세대였다는 것도 몰랐다. 그때 따뜻한 이불 속에서 지낸 게 다 ‘김상사’와 ‘박일병’들 덕분이었다. 그러므로 ‘과거’에 대해서는 현장에 있지 않았던, 알지도 못하는 것들은 입 닥쳐야 마땅하다! ‘전쟁’을 모르는, 최소한 나이 60세 미만의 애송이들은 이제 ‘건국 60년’의 기치 아래서 5년 간 침묵해야 한다, 순이처럼.

촛불집회에 가장 먼저 제동을 건 단체가 대한민국특수임무 수행자(HID)들이었다. 우리나라 영화가 처음으로 천만 관객을 돌파한 게 강우석의 <실미도(2003)>였다. HID 대원들은 영화 <실미도>를 통해 비로소 세상에 존재를 알리고 복권됐다. 그리하여 구국의 사명에 젖은 이들이 촛불의 불온성을 가장 먼저 감지하고 예전에 훈련받은 대로 ‘애국적’으로 행동한 것이었다. 이후 이들의 활동은 몹시 활발해졌다.

이준익 감독은 얼마 전, 예전에 강우석 감독이 흔쾌히 수십억을 빌려줘 대박영화를 만든 에피소드를 고백했다. <강철중>과 <님은 먼 곳에>의 개봉을 앞둔 시기였다. 두 사람의 우정과 인품은 동반상승했다. 군복에 얽힌 향수를 청춘의 추억으로 승화시킨 두 감독은 HID 대원들에게는 현역으로 봉사할 정당성을, 참전용사를 비롯한 월남전 세대들에게는 ‘전선’의 긴장을 만끽할 기회를 선사했다. ‘건국 60년 대한민국’의 ‘청춘’과 ‘애국’은 그렇게 ‘먼 곳’에 다녀오신 ‘님’들의 것이다.
  • 기사입력 : 2008-08-27 11:34:34
  • 최종편집 : 2008-08-27 13:13:53